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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곡식을 먹는다.  충분히 씹어 먹는다.  조금만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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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에 좋은 거에요?

누군가, 통밀떡과 통밀싹을 먹으면 어디에 좋은지 물으면 나는 서슴없이,

“만병통치에요!" 하고 말한다. 

물론, 당연히 만병통치일리가 없겠지만 통밀떡과 통밀새싹에 대한 나의 믿음은 그만큼 절대적입니다.

 

  만약 삼십여년전 사업을 정리하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중앙시장에서 장사를 걷어치우고 집에서 몇 개월 쉬던 나는 돈 50만원을 들고 집을 나왔습니다.

어딘가에서 일년정도 시간을 보내며 글을 좀 쓰고 싶다는 생각에서 였습니다. 

 목적지 없이 영등포역에서 경부선 열차에 올랐습니다. 

경부선에 오른 건 아마도 그 열차가 가장 빨리 도착하는 열차였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스무살 전후 무전여행을 할 때는 어디든 거리낌이 없이 찾아 다녔는데, 일년간은 정착해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왠지 서울에서 멀어지면 안될 것같은 막연한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김천에 내린 것은 순전히 그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돈으로 일년을 버텨야 했으므로 첫날은 독서실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바로 방을 얻으로 다녔지요. 돈이 없으니 변두리로 나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김천은 시였지만 김천역에서 버스로 서너정거장만 벗어나면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고 그런 곳에 복덕방같은 곳이 있을 리가 없었으므로 동네구멍가게를 찾아다니거나 동네주민들한테 물어보아야 했습니다. 보증금 걸 돈이 없어 걱정했는데 그곳은 서울과는 달리 월세가 아닌 보증금없이 년세로 한꺼번에 받고 있었습니다. 

  어렵지 않게 년새 20만원을 주고 방한칸을 구해 들어 갔습니다. 이십만원이란 큰 돈을 한꺼번에 낸다는 게 적지 않이 부담이 되었지만 또 하루를 독서실에서 보내며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교동의 연꽃이 무성한 연화지라는 저수지 인근에 있는 집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쌀로 밥을 해먹을 생각이었으나 글로리아 김 선교사님께서 말씀하신 무교병 (통밀떡)이 생각났고 식어도 먹을 수 있고 반찬이 없어도 먹을 수 있고 가지고 다니면서도 먹을 수 있다는 말씀이 생각나 통밀떡을 해먹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곧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통밀을 구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고, 설사 구한다 하더라도 그걸 메고와서 씻고 조리질을 해서 최소 이틀을 말려야 했고 또 방앗간에 메고가서 빻아 와야 하는 과정을 생각하니 전혀 내키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글로리아 김 선교사님이 간곡하게 몇 번이고 말씀하셨던 표정이 떠올라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두번씩이나 음식을 해가지고 오신 것은 물론 나중엔 저를 도와주기 위해 미국에 들어가 자신의 남편을 한국에 들여보내서 만날 수 있도록 까지 신경을 써 주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분께서 저를 위해 간절하게 부탁하셨던 것을 이번 기회가 아니면 어쩌면 영영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이라도 빚을 갚는 심정으로 실천해보기로 했습니다.

글로리아 선교사님은 통밀떡을 전해주심으로 제 생명을 구해주시고 새로운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신 고마운 분이기도 하지만 그와 함께 또 제가 살아가는 내내 항상 제 양심을 일깨우도록 큰 교훈을 주신 분이기도 합니다. 

 통밀떡을 쪄 오시기 전 칼국수를 끓여오셨을 때였습니다. 식지 않고 넘치지 않도록 버스를 타고 가져오신 정성만으로도 감격해서 어떻게 생긴 칼국수인지, 맛은 어떤지 살필 정신도 없이 가져오신 김치와 함께 먹기 시작하는데,  

“고추가루 값이 너무 비싸서 넣지를 못했어요. ..”

미안해 하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김치가 허연색이었습니다. 고춧가루값이 천정부지로 뛰어 김치라는 말대신 금치라는 말이 처음 나왔을 때였습니다.

“ ... 내 한 입맛을 위하자고 그 비싼 고춧가루를 넣지 못하겠더라구요. 굶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네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잖아요..”

그 순간 저는 큰 감동과 깨우침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말씀은 그저 벽에 건린 족자같은 구절이었는데 그 허연 김치를 통해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비로서 살아있는 교훈으로 다가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살아가는 곳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와 항상 제 양심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조금도 무뎌지지 않은 채로.

 

  서울에서 자랐기 때문에 한번도 밀을 본적이 없었고 또 통밀이라는 걸 파는 데가 있을지도 무척 걱정이 되었는데 다행히 김천역 앞의 한 잡곡상에서 통밀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일이 삼십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생생히 떠오릅니다.

혹시 통밀있나요? 하고 한 잡곡상에 들어서며 말했을 때, 칠십 가까이 되어 보이는 노인이 놀라시며 대뜸, 밀을 뭐하시게? 하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래 저는, 빻아서 개떡처럼 쪄서 밥대신 먹을 거라고 했더니, 노인장께서 고개를 크게 끄덕이면서, 나는 빻아서 미숫가루처럼 물에 타서 먹는데, 정말 좋아. 내가 낼모레 칠십인데 지금도 쌀 두가마니씩 진다네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체구도 저처럼 작고 마른 노인이 쌀 두가마를 지고 다닌다는 말에 저는 이 말을 믿어야 할지 잠시 당황했습니다. 쌀두가면 당시엔 짚가마니였고 한가마가 80kg 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믿을 수 없었는데 노인의 풍모가 허튼 소리를 할 분이 아니었기에 반신반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인노인이 창고로 밀을 가지러 나가자, 함께 있던 젊은 여자분이 자신은 며느리라고 소개하며,

아저씨, 밀 정~말 좋아예, 좀 괜찮고 그런집 사람들끼리만 남한테는 안알려주고 자기들만 몰래 먹는다 아입니까.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글로리아 선교사님께서 그렇게 침이 마르도록 말씀하셨던 터여서 정말 좋긴 좋은 모양이구나 생각하며 간곡한 당부를 외면하지 않기를 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도데체 뭐가 얼마나 좋기에 저렇게 좋다고들 할까 여간 궁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낑낑대고 메고와 서너번 물로 깨끗이 씻고 조리질로 돌 뉘 겨 쭉정이에 쥐똥까지 걸러내고는 말릴 곳이 마땅치 않아  좁은 방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그곳에 널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잘 때는 그 위에 다시 신문지를 덮어놓고 그 위에서 잠을 잤습니다. 

삼월경이었지만 제 마음은 엄동설한이었습니다. 방세를 주고 최소한의 살림살이를 사고 나니 남은 돈이 이십여 만원정도 뿐이 남아 있지 않아 정신이 바짝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루에 그보다 많은 돈도 벌어도 보고 써보기도 했는데, 그 돈으로 일년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긴장 정도가 아니라  몸이 떨릴 정도로 머릿속이 한기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이틀을 말리는 동안 처음에는 밥 대신에 그 통밀을 날로 씹어 먹으려 했지만, 부드러운 음식에 길들여진 혀와 입천장이 갈라지는 데다 나중에는 껌이 되어 먹을 수 없어서 결국 이틀은 라면을 사다 끓여 먹었습니다. 

 이틀을 대충 말려 동네 방앗간에 가져가서 두 번을 내리니 꼭 닭사료같았습니다. 한번 더 내리면 방아삯을 더 달라고 할 것 같아 두 번만 내리게 되었고 거칠게 빻게 된 것이지요.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인데 이때 만약에 방아삯 걱정없이 아주 곱게 빻았더라면 지금까지도 거칠게 빻아서 먹는 일은 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빻아온 것을 일일이 밥공기로 되어 세어 보았더니 한달을 나기 위해서는 하루 한공기 이상을 먹으면 안되었습니다. 소식을 할려고 해서 한 게 전혀 아니라 소식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소식을 했던 것입니다.

 

 글로리아 김 선교사님께서는 반찬이 없어도 먹을 수 있다고 하였지만, 짜고 맵고 달콤하고 부드럽고 감칠맛 나는 음식에 길들여진 입맛 탓에 소금도 전혀 넣지 않은 그 밍밍한 것을 그대로 먹자니 더우기 경험이 없어 푹 쪄지지도 않아 생밀가루 냄새가 펄펄 나는 것을 반찬도 없이 먹자니 토가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게다가 위가 약해 김치만 넘어가도 식도부터 쓰리고 만성속쓰림과 신물에 고통을 겪던 터여서 그 거친 것을 먹자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시장에서 김과 간장, 멸치와 고추장을 사와 반찬으로 해서 먹으니 한결 먹기가 편했으나 짜고 맵게 먹으니 자꾸 더 먹게 되어 처음 보름정도 동안은 제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마아가린을 발라 먹기로 하였지요. 당시는 마아가린같은 경화유가 몸에 좋지 않다는 걸 알 턱도 없었고 그런 정보도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상당히 잘 한 일임을 알았습니다, 마아가린 덕에 허기를 많이 덜 수 있었고, 변을 한결 더 쉽게 볼 수 있게 해주었으니까.

 

통밀가루 한공기를 둥글납작하게 쪄서 여덟 등분해서 한끼에 두쪽을 먹었습니다. 손가락 두 개만 한 것 두쪽이었습니다. 처음 얼마나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모릅니다.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팠지요. 

 그런데 통밀떡을 먹고 그 다음날부터 변을 하루 두세 번 보는데 엄청 쏟아져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화장실이 퍼세식인데다 아래가 깊고 어두워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한건 하루 한공기의 통밀가루로 한끼에 손가락 두 개정도의 통밀떡 만을 먹었는데 나오는 건 거의 세수대야 수준으로 느껴젔습니다. 일주일 정도 계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내 뱃속 어디에 그 많은 양이 있었던 건지.

그런데 가뜩이나 배가 고픈데, 뱃속에 쌓여있던 숙변들 까지 빠지니 더욱 힘이 없었습니다. 여지껏 나를 지탱해 준 것은 척추힘이 아니라 뱃속의 똥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방구는 왜 그렇게도 많이도 나오는지, 나올 때마다 배가 쑥쑥 꺼졌습니다. 물론 냄새는 다시 맡고 싶을 정도로 아주 구수한 냄새였습니다.

이 무렵, 대략 통밀떡을 먹은지 일주일 정도되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김천도서관을 가기위해 인도가 없는 갓 길, 가로수 옆길을 따라 시내로 걸어가던 중이었습니다. 배가 많이 고프다고 느끼는 순간 갑자기 참을 수 없는 허기가 몰려오면서  동시에 온몸의 힘이 일순 다 빠져나가버렸습니다. 몸이 가볍게 떨리기 시작했고 정신도 흐려져 몸을 지탱할 수가 없어 그 자리에 철버덕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식은땀까지 나면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정신을 놓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꺼져가는 정신의 끈을 놓치 않으려고 머릿속 껌껌한 가운데 한가닥 실오라기같은 희미한 빛을 악착같이 놓지 않으며 간신히 도로가 풀숲으로 기어가 풀속에 코를 박으니 땅기운과 풀향기가 시원하게 느껴지며 조금 살 것 같았습니다. 팔을 간신히 움직여 잠바 안주머니 속의 통밀떡을 꺼내어 조금씩 씹어먹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이걸 집어넣지 않으면 죽을 것같다는 절박한 생각이 들어 힘을 내어 죽기살기로 먹기 시작했지요. 입안에는 침한방울 없어 먹기 힘들었지만 씹어야 산다는 생각으로 정신없이 씹어 삼켰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이 들고 기운이 조금씩 돌아왔습니다. 

 

저는 그때 당시는 단순히 심하게 허기가 져서 그런 것인가 보다 라고만 생각했지 그것이 저혈당쇼크가 온 것인지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날 이후로도 비슷한 일이 몇 번인가 있었지만 한달 정도가 지나자 그런 증상은 없어졌습니다. 물론 당시 병원에 가본일이 없으니 제가 당뇨병을 앓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린 시절의 제 생활을 생각해 볼 때 당뇨가 오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할 터 였습니다.

 어린 시절 제가 어떻게 자랐는지는 추후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통밀떡이야기'는 어떠한 상업적광고도 거부하며 철저히 비영리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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